사우디 알울라 헤그라 (카스르 알파리드, 나바테아 문명, 유적 보존)

사우디아라비아에 요르단 페트라보다 먼저 세워진 고대 도시가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저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알울라의 헤그라에서 '카스르 알파리드'를 실물로 마주하는 순간, 그 의심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붉은 사암 산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무덤 앞에서 숨이 턱 막혔고,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페트라에서 느꼈던 소름, 헤그라에서 다시 만나다

요르단 페트라의 알시크(Al-Siq) 협곡을 걸어본 분이라면 아실 겁니다. 1.2km에 달하는 붉은 사암 절벽 사이를 걷다가 갑자기 시야가 확 열리면서 알 카즈네(Al-Khazneh)가 등장하는 그 순간을요. 알 카즈네란 나바테아 왕국이 바위 전면을 깎아 만든 헬레니즘 양식의 거대 신전으로, 영화 '인디애나 존스-마지막 성배'에 등장해 전 세계에 알려진 건축물입니다. 저는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그 기억이 이후 헤그라를 찾는 결정적 이유가 됐습니다.

그런데 헤그라에서 마주한 카스르 알파리드(Qasr Al-Farid)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저를 압도했습니다. 카스르 알파리드란 아랍어로 '외로운 성채'를 뜻하며, 헤그라에 남아 있는 110여 개의 바위 무덤 중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입니다. 드넓은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붉은 사암 덩어리 하나가 홀로 서 있고, 그 전면부를 수직으로 깎아내려 웅장한 파사드(façade)를 완성한 모습이었습니다. 파사드란 건물의 정면 외관을 가리키는 건축 용어로, 이 경우엔 자연 암벽 그 자체가 건물의 정면이 된 셈입니다.

제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 중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건축 방식이었습니다. 비계(飛階), 즉 공사 중 작업자가 오르내리기 위해 설치하는 임시 발판 구조물을 전혀 쓰지 않고, 바위 꼭대기에서 발밑을 파내려오는 방식으로 전면부를 조각했다고 합니다. 밑그림도 없이, 둥근 사암 덩어리를 위에서부터 깎으면서 기둥 네 개와 메두사 조각, 그리고 영혼의 승천을 상징하는 계단형 상단 문양까지 완성했다는 이야기를 가이드에게 듣는 순간, 저는 2000년 전 석공의 손끝이 얼마나 치밀했는지를 실감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2019년에야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헤그라를 개방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동안 사우디는 7세기 이슬람 문명 이전의 문화유산, 특히 다른 종교나 문명과 뒤섞인 유적은 국가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하메드 빈살만 왕세자의 '비전 2030' 정책 발표 이후 알울라는 사우디 관광의 핵심 거점으로 빠르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헤그라는 이제 사막 한복판의 숨겨진 유산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고고학적 보고로 재탄생하는 중입니다.

나바테아 문명이 사막에서 살아남은 진짜 이유

헤그라를 이해하려면 먼저 나바테아 왕국이 어떤 문명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바테아(Nabataean)란 기원전 1세기경부터 아라비아 반도 북부에 세력을 키운 고대 왕국으로, 요르단 페트라를 수도로 삼고 예멘에서 들어온 향신료, 유황, 몰약 등을 지중해와 유럽으로 잇는 대상무역(캐러반 무역)으로 번성했습니다. 헤그라는 그 나바테아 왕국이 와디럼 사막을 건너 남쪽에 세운 주요 거점 도시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사막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헤그라 곳곳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바로 치수(治水) 기술, 즉 빗물과 수자원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나바테안'이라는 이름 자체가 아랍어 '나바투(Nabatu)'에서 유래했는데, 나바투란 '우물에서 샘솟는 물'을 뜻합니다. 이름에서부터 이미 물의 민족이었던 겁니다.

헤그라에는 페트라와 마찬가지로 빗물을 모으는 저수조 탱크와 수로 시스템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연회장으로 쓰였던 알 디완(Al-Diwan) 내부에도 지붕에서 흘러내린 빗물을 받아 한쪽으로 흘려보내는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알 디완이란 자발 이틀립(Jabal Ithlib) 사암 산맥의 좁은 협곡 안에 바위를 파서 만든 높이 12미터짜리 사각형 홀로, 나바테아 왕국의 고위층들이 회의와 연회, 연설에 활용하던 공간입니다. 제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돌 벤치 세 면이 벽을 따라 배치돼 있었고,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의 각도를 보며 이 공간이 단순한 회의실이 아니었음을 직감했습니다.

나바테아 문명의 물 관리 기술이 실제로 얼마나 정교했는지, 헤그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수자원 시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암벽 상단의 빗물 집수 홈(채널): 바위 표면을 V자형으로 깎아 빗물이 자연스럽게 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유도하는 구조
  2. 지하 저수조 탱크: 모인 빗물을 장기 보관하기 위한 석조 저장 시설로, 다단 왕국 유적지에서도 대형 탱크가 발굴되었습니다
  3. 인공 수로 시스템: 저수조에서 주거지와 신전, 시장까지 물을 공급하는 배급망으로, 페트라와 헤그라 양쪽에서 모두 확인됩니다
  4. 알 디완 내부 배수 시설: 연회 공간 안에서도 빗물을 모아 손 씻기와 조리에 쓸 수 있도록 설계된 실용적 구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사막 유적지라고 하면 웅장한 건축물이나 조각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이 도시의 진짜 경쟁력은 물이었습니다. 대추야자가 울창하게 우거진 오아시스 숲이 지금도 헤그라 한가운데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개방은 반가운데, 유적 보존은 괜찮을까

자발 이크마(Jabal Ikmah)에서 저는 한참 멈춰 섰습니다. 자발 이크마란 '이크마 산'이라는 뜻으로, 헤그라 일대에서 신성한 명상의 장소로 여겨지던 암산입니다. 이 계곡 바위 벽면에는 아람어, 타무드어, 다단어, 나바테아어,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까지 수천 년에 걸쳐 새겨진 고대 명문과 암각화가 빼곡히 채워져 있습니다. 소, 염소, 새를 그린 그림들 사이로 여행자들이 신에게 안전을 빌며 남긴 메시지들이 석벽 위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겁니다. 현지에서는 이 곳을 '고대의 트위터' 또는 '오픈 뮤지엄'이라고 부릅니다.

알울라 지역에서 발굴과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이 명문들은 아랍어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라고 합니다. 현재 알울라 발굴 프로젝트는 프랑스와 사우디아라비아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대형 고고학 사업으로 진행 중입니다. 

헤그라 지하에 아직 도시 대부분이 묻혀 있고, 성벽과 신전, 주거지, 공방, 학교 등의 유적이 발굴 중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저는 솔직히 걱정이 앞섭니다. 비전 2030 정책 이후 알울라를 찾는 관광객 수가 빠르게 늘고 있는데, 발굴이 채 끝나지도 않은 유적지에 대규모 관광 인프라를 들이미는 방식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기에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할 수 있었던 사암 유적들이, 관광객의 발길과 열기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가 진심으로 우려됩니다.

헤그라의 사암(砂岩, sandstone)은 압축된 모래 입자로 이루어진 퇴적암으로, 표면이 연하고 풍화에 민감합니다. 실제로 카스르 알파리드의 파사드 일부에서도 바람과 습기로 인한 풍화 흔적이 눈에 띄었고, 제 경험상 이런 재질의 유적은 사람의 손길 하나에도 생각보다 쉽게 손상됩니다. 관광 상품으로 소비하기 전에, 출입 인원 제한과 탐방 동선 통제, 사막 생태계 보호 같은 수용 관리 정책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헤그라(알울라)는 언제, 어떻게 방문할 수 있습니까?

A. 사우디아라비아가 외국인 관광 비자를 본격 발급하기 시작한 2019년 이후 방문이 가능해졌습니다. 리야드나 제다에서 국내선을 타고 알울라 공항으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현지에서는 가이드 동반 투어 형태로 헤그라와 자발 이크마 등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기후 특성상 10월부터 3월 사이 방문이 쾌적합니다.

Q. 페트라와 헤그라는 어떤 점이 다릅니까?

A. 두 곳 모두 나바테아 왕국이 세운 도시이지만, 페트라가 왕국의 수도로서 규모와 다양성이 크다면, 헤그라는 무덤 건축물이 사막 한가운데 홀로 흩어져 있어 더 광활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줍니다. 페트라는 협곡 안에 도시가 집중돼 있는 반면, 헤그라는 탁 트인 사막 위에 바위 산들이 점점이 퍼져 있어 전혀 다른 감동을 줍니다.

Q. 카스르 알파리드가 무덤인데, 누가 묻혀 있습니까?

A. 카스르 알파리드는 '쿠자의 아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둥이 네 개인 점으로 미루어 왕족이나 최고위 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내부 발굴이 완료되지 않아 정확한 신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프랑스와 사우디 공동 고고학팀이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Q. 헤그라 유적 보존 상태는 어떻습니까?

A. 오랫동안 외부에 공개되지 않아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는 편입니다. 그러나 사암은 풍화에 민감한 퇴적암이라, 관광객 증가와 대규모 인프라 구축이 장기적으로 유적에 미칠 영향이 우려됩니다. 현재 발굴 구역과 관람 구역이 분리 운영되고 있지만, 체계적인 수용 인원 관리 정책이 더 강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Q. 자발 이크마의 암각화는 직접 만져볼 수 있습니까?

A. 접근은 가능하지만 암각화를 직접 손으로 만지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수천 년간 바위에 새겨진 명문과 그림은 인체의 유분과 열에도 손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이드와 함께 정해진 탐방로를 따라 감상하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헤그라는 여태 제가 가본 유적지 중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화려하게 정비된 관광지가 아니라, 아직 땅속에 더 많은 이야기가 묻혀 있는 살아 있는 발굴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알울라를 고려하고 계신다면, 관광 인프라가 더 들어서기 전 지금이 가장 날것 그대로를 경험할 수 있는 시기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방문할 때는 유적을 소비하는 관광객이 아니라 보존에 기여하는 방문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먼저 챙겨 가시길 권합니다.

우리 모두가 나라의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켜나가야 하는 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 참고: https://bizn.donga.com/3/all/20230101/11724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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