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여행 (만리장성, 798예술촌, 후퉁)
팔달령 장성의 오르막을 처음 밟던 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사진으로 수백 번 봤던 그 성벽이 실제로 발밑에 펼쳐지자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랄까요. 베이징은 만리장성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지만, 도심으로 돌아오면서 만나는 두 번째 얼굴이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이 도시의 속살을 직접 걸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베이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세월을 버텨낸 성벽 앞에 서다
베이징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80km쯤 달리면 팔달령 장성(八达岭长城)이 나옵니다. 만리장성(萬里長城) 전체 구간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구간으로, 이름 그대로 여덟 방향으로 길이 통한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올라가 봤는데, 입구에서 갈라지는 여판길과 남판길의 체감 난이도 차이가 꽤 컸습니다. 여판길은 경사가 가팔라 다리가 금세 풀리고, 남판길은 상대적으로 완만한 편이었습니다.
성벽 위에 올라서면 능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굴곡이 눈에 들어옵니다. 흔히 "용이 춤추는 형상"이라고 표현하는데, 직접 겪어보니 그 말이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돌 하나하나에 손을 얹으면 투박하고 거친 질감이 그대로 전해져서, 이걸 사람 손으로 쌓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만리장성은 세계유산(World Heritage Site)으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세계유산이란 유네스코(UNESCO)가 전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해야 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으로 공인한 것을 뜻합니다. 진시황 시대에 골격을 갖춘 이래 지금도 새로운 성터가 발견되고 있고, 본성에서 뻗어 나간 지선까지 합치면 전체 길이가 5,000km를 넘습니다. 그 규모를 수치로 읽는 것과 실제로 발로 걸어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한 가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팔달령은 워낙 유명한 곳이다 보니 인파가 상당합니다. 주말이면 성벽 위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입구 주변에는 기념품 호객 행위도 적지 않습니다. 유적 본연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기대하고 갔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압도적인 스케일만큼은 어떤 군중도 가릴 수 없었습니다.
만리장성 관련 보존 현황과 세계유산 등재 정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식 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폐공장이 갤러리가 된 곳, 798예술촌의 열기
만리장성을 내려와 베이징 시내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는 이미 다음 행선지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목적지는 다산쯔(大山子), 흔히 '798예술촌'이라 불리는 예술특구였습니다. 군수공장의 폐허 위에 갤러리와 스튜디오가 들어선 곳이라고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는데, 막상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노후화되거나 기능을 잃은 도시 공간을 새로운 용도로 살려내는 과정을 뜻합니다. 다산쯔는 그 교과서적인 사례 중 하나입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예술가들이 하나둘 빈 공장 건물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고, 지금은 100여 개의 갤러리가 골목마다 오밀조밀 자리 잡았습니다. 뉴욕 브루클린의 움직임과도 유사하다는 평이 많은데, 직접 걸어보니 그 비교가 꽤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반나절을 꼬박 걸었는데도 다 못 봤습니다. 설치미술(Installation Art), 즉 공간 자체를 작품의 일부로 활용하는 현대미술 형식의 작품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긴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외국인 아티스트들이 골목 한쪽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여기서는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다산쯔에서 주목할 만한 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군수공장과 양조장 건물의 외벽을 그대로 살린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 전시 공간과 묘하게 어울립니다.
- 한국 갤러리들도 지우창(酒廠) 지구에 입점해 있어, 한국 현대미술 작품을 베이징에서 만나는 색다른 경험이 가능합니다.
- 상업 갤러리부터 소규모 독립 스튜디오까지 스펙트럼이 넓어, 취향에 맞는 공간을 찾는 재미가 있습니다.
- 최근에는 다산쯔를 떠난 예술가들이 인근 지우창 등 한적한 공간으로 이동하는 추세라, 두 곳을 함께 둘러보는 것을 권합니다.
다만 솔직히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예술특구라는 이름과 달리, 관광 상품화가 꽤 진행된 구역들에서는 갤러리보다 카페나 기념품 가게가 더 많이 보였습니다. 예술가들이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점차 외곽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 즉 지역이 개발되면서 원래 거주하거나 활동하던 사람들이 떠나는 현상이 여기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후퉁의 밤, 낭만과 상업화 사이
베이징의 밤은 스차하이 후퉁(什刹海胡同)에서 시작하는 게 정석이라고들 합니다. 후퉁(胡同)이란 원래 몽골어에서 유래한 말로, 베이징의 전통적인 좁은 골목길을 뜻합니다. 수백 년 된 사합원(四合院), 즉 중앙 마당을 중심으로 네 방향에 건물이 배치된 전통 가옥들이 골목 안쪽에 촘촘히 들어서 있습니다.
제가 인력거를 타고 골목 안을 누볐는데, 그 느리고 덜컹거리는 속도가 오히려 좋았습니다. 담장 너머로 빨래가 널려 있고, 좁은 골목 사이로 자전거가 지나치는 풍경은 분명히 살아있는 생활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후퉁 입구로 나올수록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옛날 가옥을 개조한 스타벅스, 가격이 베이징 최고 수준이라는 노천카페들, 그리고 관광객을 겨냥한 기념품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후퉁이 베이징의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그건 절반만 맞는 말이었습니다. 호숫가 불빛 아래 연인들이 앉아 있는 밤의 스차하이는 분명 낭만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서민들의 삶이 녹아 있던 골목 고유의 온기는 점점 상업화라는 이름으로 희석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베이징시의 후퉁 철거 및 재개발 규모는 상당합니다. 베이징 도시계획 및 자연자원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수십 년에 걸친 도시 개발 과정에서 역사적 후퉁 구역 상당 부분이 변형되거나 소실됐습니다. 밤이 되면 후퉁 입구에서 베이징 시민들이 모여 지르박 같은 모던 댄스를 추는 모습은 여전히 살아있는 동네의 흔적이었지만, 그 주변을 둘러싼 풍경은 이미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전취덕(全聚德)의 오리구이는 그래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1864년에 문을 열어 16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온 이 노포의 베이징 덕(北京烤鴨, 베이징 카오야), 즉 껍질을 얇게 저며 파와 된장소스에 곁들여 먹는 전통 방식의 오리구이는 입에서 살살 녹는 수준이었습니다. 왕푸징(王府井大街) 동화문 먹자골목에서 전갈 꼬치를 앞에 두고 한참 망설이다 결국 먹어버린 것도 지금 생각하면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팔달령 장성과 다른 만리장성 구간의 차이가 뭔가요?
A. 팔달령 장성은 베이징 시내에서 가장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구간이라 관광객이 가장 몰리는 곳입니다. 대신 무티안위(慕田峪) 구간은 팔달령보다 인파가 적고 성벽 보존 상태가 좋아, 좀 더 여유 있는 관람을 원하는 분들에게 선호됩니다. 제 경험상 처음 베이징을 방문하는 분이라면 접근성이 좋은 팔달령을, 두 번째 방문이라면 다른 구간 도전을 권합니다.
Q. 798예술촌(다산쯔)은 반나절이면 충분한가요?
A. 제가 직접 다녀온 기준으로 반나절로는 부족했습니다. 갤러리 100여 곳을 제대로 보려면 하루를 잡는 게 낫고, 인근 지우창까지 함께 보려면 여유 있게 시간을 배분하는 것이 좋습니다. 개장 시간이 갤러리마다 다르니, 오전 10시 이후에 방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Q. 후퉁 투어는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게 좋나요?
A. 스차하이 후퉁에서 출발하는 인력거 투어가 가장 대중적입니다. 단, 가격 흥정이 필요하고 바가지 요금 사례가 있으니 탑승 전 요금을 명확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보로 직접 걸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고, 낮에는 골목 일상을 보고 밤에는 호숫가 분위기를 즐기는 낮+밤 조합을 개인적으로 추천합니다.
Q. 전취덕 오리구이, 예약 없이 가도 되나요?
A. 전취덕 본점은 워낙 유명한 곳이라 성수기에는 대기 시간이 꽤 깁니다. 사전 예약이 가능하다면 미리 해두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왕푸징 지점 등 분점도 여럿 있으니, 본점에 너무 집착하기보다 동선에 맞는 지점을 선택하는 것도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Q. 베이징 여행 중 상업화된 관광지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솔직히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팔달령 장성은 평일 이른 오전에, 다산쯔는 상업 구역보다 안쪽 골목을 탐색하고, 후퉁은 스차하이 주변보다 동쪽이나 서쪽 비주류 골목을 걷는 방식으로 조금이나마 덜 관광화된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도시의 진짜 얼굴은 대로변보다 골목 안쪽에 있습니다.
베이징은 분명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만리장성의 압도적인 스케일, 798예술촌의 창작 에너지, 후퉁의 낮과 밤이 모두 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 도시의 빠른 변화가 늘 옳은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지는 않다는 것도 직접 겪어보며 느꼈습니다. 다음에 베이징을 찾는다면 유명 명소보다 아직 덜 알려진 후퉁 골목과 지우창 언저리를 더 천천히 걷고 싶습니다.
다음 중국 여행때도 방문해서 좋은 시간 보냈으면 하는 소망이 생깁니다.